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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한잔의_향기

    영화 '매트릭스' - 유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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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매트릭스(열반, 삼법인, 해탈)
    매트릭스와 함께 한 지난 몇 년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로 이어지는, 정보화 혁명, 디지털 혁명이 시작된 인류 역사상 가장 역동적 변환기였다. 지금도 그 눈부신 변화는 진행 중이지만 매트릭스는 영화의 영역을 벗어나 이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진짜 삶이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미 알려져 있듯이 매트릭스는 기독교적 희생과 구원의 개념을 모티브로 해서 불교의 선사상과 문명사적인 수많은 것들을 거대한 용광로처럼 융합해서 독특한 형상을 만들어 냈다.
    매트릭스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그렇다면 지금 너의 삶은 무엇인가,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 본질적인 화두를 영화속에서 어떻게 나타냈을까? 그리고 우리들의 의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을 어떻게 나타냈을까?
     ․ 가상현실과 실제세계
    네오는 낮에는 소프트웨어회사의 프로그래머로, 밤에는 컴퓨터 해커로 살아간다.
    어느 날,자신의 컴퓨터에 이상한 자막이 뜬다. 그리고 그 자막을 따라 찾아간 곳에서 트리트니를 만나게 된다.
     트리트니는 네오를 모피어스에게 인도하고,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이 매트릭스에 의해 조종되는 가짜 세상이라 알려준다. 자신들이 노예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통제되고 조작되는 세상. 또한 네오가 바로 매트릭스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The one(그)”라고 확신한다.
    정작 네오는 이를 반신반의한 채로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한 각종 훈련을 마스터하게 된다. 사이퍼의 배신에 의해 사로잡힌 모피어스를 구하러 출동하는 네오는 마지막 순간에 요원들의 총알세례를 받고 쓰러지지만, 사랑과 확신이 담긴 트리트니의 키스를 받고 되살아난다. 더욱 강력해진 네오는 매트릭스를 해독하면서 마침내 지금까지 아무도 당할 수 없었던 요원들을 물리치게 된다.
    이 영화의 공간은 매트릭스라는 컴퓨터가 지배하는 가상현실과 가상현실에서 탈출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실제의 세계로 나뉘어 질 수 있다. 이 두 세계는 허위와 허식이 가득한 세계와 진리와 진실이 담겨 있는 공간의 대비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적절하게는 아마도 의식(Conscience)의 공간과 무의식(unconscious)의 공간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매트릭스를 의식의 공간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의식은 밝음과 규칙, 질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라는 공간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에 따라 인간들은 생활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질서와 규칙에 의해 지배받는 장소이다.
    반면, 매트릭스에서 탈출한 실제의 인간들이 주거하는 공간은 어두컴컴하고, 허름하며, 지하의 세계이다. 상징적으로 무의식은 어둡고 음습한 지하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또는 바닥 모를 깊은 바다 속도 무의식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하게 된다. 이유는 무의식은 밝은 의식의 공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곳에 어떤 것이 숨겨져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트릭스가 꾸며지고 조작된 것처럼, 의식은 의외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회의 가치관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의식의 많은 부분은 남의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나치게 의식에 매달리다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가지 못하고, 남들의 생각이나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관대로 사는 경우가 많다.
    바로 매트릭스에 등장하고 있는 컴퓨터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프로그램은 이미 인간의 운명을 정해놓고 그 방향대로 몰아가고 있다.
    1999년 발표된 매트릭스 1편은 정보화 사회로 중심이동을 하고 있는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과학 테크놀로지의 영향력이 급증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삶의 본질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줬기 때문이다.
    매트릭스 1편에서 모피어스와 트리트니는 매트릭스는 통제다매트릭스는 시스템이다 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허구의 가상현실이며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허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시스템 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매트릭스 시리즈의 전언처럼 나는 누구인가?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우리들에게 스스로 던지게 함으로써 불교의 본질적 근원으로 돌아가게 했다.
    매트릭스와 불교와의 관련성에 대하여 지적하는 글들을 그 수가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매트릭스 시리즈(<매트릭스(THE Matrix, 1999)> <매트릭스2: 리로디드(THE Matrix: Reloaded, 2003)> <매트릭스 3: 레볼루션(THE Matrix : evolutions, 2003)>를 합쳐 보통  The Matrix Trilogy라고 부른다)에 끊임없이 나오는 너무나 명백한 불교적 상징들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에 끼친 영향력을 겨우 일체유심조한 구절 정도로만 축소하여 생각하는 점에 대해서는 안타까움마저 느껴진다.
    서구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갖는 한계를 타파하고 방향성을 모색하는 방법으로 이 영화가 불교적인 사상을 차용하고 있음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는 그것이 비불교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대중 영화인 동시에 지극히 불교적인 세계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매트릭스란 무엇인가?
    그것은 네오가 살고 있는 20세기말의 세계이며, 이미 멸망한 세계를 대체하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상현실 세계는 주인공이 일상적으로 이것이 현실이라고 믿게끔 만드는 사물로부터 정보를 교란하여 자신이 그 체제(매트릭스)안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매트릭스는 진실로 보지 못하도록 우리 눈을 가린다는 점에서 불교의 삼사라(Samsare, 윤회)와 같다. 생명을 가진 뭇 존재들은 자신이 욕망에서 지은 현재의 업(業)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결과를 받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고통을 느끼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윤회 속에 이끌려 다니는 한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부르고,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거대한 체제 자체를 그렇게 본다. 모피어스와 트리트니는 말했다- 그것이 매트릭스의 본질이라고…
    모든 불교도의 최종적인 목표는, 재생과 소멸을 부단히 계속하는 이 쳇바퀴 같은 삼사라의 굴레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최종목표인 열반은 범어로 nirvana, 즉 욕망의 불길이 꺼진 상태를 의미하며, 자유․ 해방․ 해탈 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불교의 윤회에 대입하여 매트릭스를 이야기 하였다. 독실한 불교도와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 나오는 매트릭스 안에 갇힌 사람들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매트릭스를 자각하고 빠져 나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며 그 모습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매트릭스를 벗어나는 가장 흔한 방법은 네오가 그랬듯이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먹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갖고 빨간 알약을 선택하는 것 외에 매트릭스를 벗어나는 또 다른 길은 명상을 통한 자각이다. 의식적 앎과 무의식 사이에 세워진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다.
    매트릭스 세계 내에서의 구원은 많은 부분 스스로의 동기 유발과 자각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개인의 의식변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불교는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가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파악하고 현혹된 방식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자각, 즉 그 사람의 의식과 현실 인식방식을 변화 시키는데 있다.
    우리 자신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내가 보고 느끼고 맛보는 이 세계는 절대불변의 진짜 세상이라고 믿고 싶어 할지 모르겠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는 감각기관에, 그리고 또 다른 존재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은 무아(無我)라는 개념을 통해 자아가 있는 독립된 라는 개념을 통해 자아가 있는 독립된 나 자신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음을 설파한다.
    이러한 자각은 장황한 이론과 지식만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피어스는 계속해서 네오를 독려한다. 생각해서 알지 말고, 느끼고 믿으라고.
    모피어스는 1편 끝까지 길 안내자 역할을 하며 중요한 것은 행동하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확히 그의 말을 따른 끝에 네오는 자각한다. 
    1편의 핵심은 스푼은 없다이다. 스푼을 휘려고 하지 말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대신 진실을 깨달아야 해요. 스푼은 없어요. 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죠. 당신의 마음이 휘면, 스푼은 휘어져요. 우리가 보는 거기에는 숟가락은 없는 것이다. 이 핵심을 이해하면, 우리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더 이상 그것에 방해받지 않는다.
    깨달은 자는 어떻게 되는가?
    깨달은 자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다.
    자신의 잘못된 인식을 걷어내 본질을 직시함으로써, 외부와 내부를 초월하는 것이다.
    매트릭스와 뇌는 상호작용을 한다. 그리고 뇌는 몸에 영향을 미친다. 네오가 훈련 도중 다쳤을 때, 훈련 프로그램을 빠져나와서도 입안에 피가 나는 것을 알게 된다. 네오가 어째서 그러냐고 모피어스에게 묻자, 모피어스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들려준다.
    “정신이 죽으면 몸도 죽지.”정신상태와 믿음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스미스 요원이 매트릭스 안 네오의 아바타를 죽이자, 네오의 뇌는 이 운명을 받아들여 실제 몸에서도 생체기능이 멈춘다. 그러나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삶을 포기하려는 찰나, 네오는 이전부터 알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깨우친다. It is not Real.
    네오는 이제 부활뿐 아니라 초인적인 힘도 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아바타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적인 수준의 앎을 넘어선, 본능적인 통찰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은 굳이 매트릭스 시스템 안으로 접속해 있을 때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매트릭스 시리즈 2편 격인 <리로디드> 마지막 부분과 <레볼루션>에서 네오는 가상공간 밖의 현실세계에서도 기계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매트릭스의 구조를 낱낱이 깨달은 네오의 힘이 똑같은 기계인 센티널에게도 미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아주 작은 예에 지나지 않는다.
    <매트릭스> 1편에서 우리는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보았다.
    그러나 <매트릭스 리로디드> 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 불교적 통일장의 세계관으로 발전한다. 매트릭스 시리즈는 자아와 세계를 구분하여 나누는 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화엄적인 사상(統萬法 明一心)을 차용하고 있는 셈이다.
    매트릭스 광 현각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1편…The one(그)이 세계를 구할 것이다.
    이집트 정부는 <매트릭스 2 리로디드>의 상영을 전면금지했다. 금지된 이유는 폭력이나 선정성 때문이 아니라, 인류창조에 대한 전통적 종교관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것이 중동지역 특정지역 하나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 영화가 금지된 이유는 인간의 실존과 창조 같은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2003년 현재의 현실세계에서조차 이처럼 곤란한 질문은 위험하다. 실존의 본질 자체에 대한 질문은 기존 종교체제를 전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또 왜 창조되었는지 묻는 것은 위험하다.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단지 거기 놓였을 뿐이다.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자유는 우리에게 없다. 당신은 매트릭스를 믿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위해 매트릭스에 도전해야만 한다.
    나는 누구인가?어떻게 내가 여기에 왔는가?맹목적 신앙은 진실한 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이 방대한 시스템의 설계자 내지 프로그래머는 선한가? 악한가?
    <리로디드>는 매우 변화적인 영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주해온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놓지 못하는 믿음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내가 접한 대중문화 가운데 이만큼 멋진 통찰을 보여준 영화는 드물다. 인간 밖의 유일한 권력을 믿는 제도화된 종교들은 또 다른 형태의 통제와 지배, 즉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매트릭스에 불과하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종교 자체가 일종의 매트릭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2편…구원자 The one(그)은 없다
    <매트릭스> 1편은 스스로 깨달은 네오가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매트릭스에 승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초 영웅적 존재인 네오가 인류를 구원하러 옴으로써 선지자의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리로디드>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린다. 모피어스가 절대적 신념을 가지고 떠받드는 예언자 오라클은 매트릭스의 권력에 봉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일 뿐이다. 오라클은 매트릭스의 어머니이고 시스템의 완전통제를 돕는다. 네오가 모피어스에게 말하듯 예언은 거짓이다.더 원의 목적은 어떤 것도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건 또 다른 통제 시스템에 불과했어.바로 이런 반전이 영화의 뛰어난 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용어와 상징만 보고 이 영화가 자신들의 종교관을 입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1편에선 세계를 구원하는 The one(그)이 단순한 정답인 듯하다. 그러나 2편은 정답대신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가르쳐온 일, 즉 질문을 제시한다. 사람들이 안주해온 신앙체계를 전복하고 무너뜨린 다음, 우리 실존의 본질 자체에 대한 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맹목적 신앙은 정답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네오는 오라클로부터 모피어스에게 전해진 맹목적 신앙을 이제 버려야 한다고 깨닫는다.
    따라서 <리로디드>는 종교적 확실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어떤 도그마나 예언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쉬운 신앙을 주창하는 영화도 아니다. 쉬운 정답 대신 위험하고 심오한 질문을 제시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상영금지된 것이다. 정치적이건 민족적이건 종교적이건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질문해야 한다.
    네오와 설계자의 만남 역시 많은 것을 제시한다. 네오는 두개의 문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 한쪽으로 가면 시온은 구하지만 연인은 죽는다. 다른 한쪽으로 가면 연인은 구하지만 시온의 주민은 모두가 멸망한다.
    The one(그)의 사명은 인류의 구원이다. 예언에 따르면 그것이 네오의 목적인 것이다. 시온을 구하지 않으면 네오는 The one(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네오는 예언으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선택하고 트리트니를 구함으로써 설계자에 맞선다. 예언의 계획 대신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따름으로써, 궁극적인 힘은 설계자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인과 법칙을 넘어서고 매트릭스 시스템의 설계자와도 대결한 네오는 홀로 서있다.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한 책임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 개인의 자유의지보다 더 큰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네오의 말처럼선택, 문제는 선택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우리 스스로 구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지와 미몽에 빠져 잠들어 있으며,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스스로 깨닫고 또 다른 사람들이 깨닫도록 도울 수 있다.
    한편 네오가 오라클을 만나러 가는 장면에선 종교물품 벼룩시장이 등장한다.
    힌두교 신, 성모 마리아, 예수상 등이 보인 후,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불상을 비춘다.
    화면 속의 부처님은 명상자세로 앉아 자기 마음의 본질을 관조하고 있다. 네오가 오라클을 만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비춰진 종교의 이미지가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1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네오는 마치 최후의 영웅 The one(그)처럼 보인다.
    하지만 2편에서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에 따르면 네오는 수학적 완성의 여섯 번째 예외, 여섯 번째 구원자이다.
    흔히 상징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에서 과연 이 여섯 번째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에 매료된 감독들의 답은 명료하다. 불교에서 2500년 전 나타난 부처님은 고해의 매트릭스인 이 우주에 나타난 여섯 번째 부처님으로 간주된다.
    고전불경 云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 미몽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한다. 만물이 유전하므로 우주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이윽고 쇠하여 적멸한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고 따라서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고 다시 또 태어나고 나는 중생들 가운데 다시 태어날 것이다.
    <리로디드>가 던지는 화두는 바로 믿음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기에 따라서는 대중문화가 성서나 불경처럼 올바로 종교적 믿음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네오가 자유의지와 책임에 대해 여러 메시지를 전한 것은 분명하다.
    네오는 적을 심판하는 대신에 각 개인이 자신의 의식을 명확하게 자각함으로써 스스로의 주체가 되는 쪽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길 바라며, 네오는 상황을 배척하기보다, 상대방에게 원인과 결과를 보여주고 스스로 선택이 가능한 상황을 제시한다. 이것은 대단히 불교적인 사고방식이다.
    매트릭스 시리즈는 불교적 코드를 빌려서 거둔 성공은 불교사상의 참신함과 심오한 통찰을 거둔 명백한 승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空)사상이나 그 밖의 불교사상은 맥락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통찰 없이 받아들인 단편적인 견해들이 얼마나 큰 잘못된 결과를 불러오는지는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런 몇몇 미흡한 점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와 불교의 비교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매트릭스는 우리가 현실이라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은유이다. 이것이 우리가 진실을 바로 볼 수 없도록 우리 눈을 가리는 세계이다.
    우리는 종종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우리 자신의 독립된 상태가 영원하다고 착각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이기주의, 욕망, 집착, 괴로움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말한다.
    金剛經 云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곧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一合相)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래께서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실제로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이름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거늘 다만 범부들이 그 일에 탐착할 뿐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