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간경수행

4.주의사항

1)경전을 읽을 때

쭬①잡념을 떨치고
위와 같은 열가지 간경의 행법들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이 몇가지 있다. 그 중에서 보다 실제적인 방법의 하나로 간경수행자의 마음가짐이나 자세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른 수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간경수행을 할 경우에도 수행자는 잡념을 떨쳐버려야 한다.
경을 읽을 때 잡념이 얼마나 무서운 작용을 하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으니, 이를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총융인 척공은 평소 <금강경>을 지송해 오던 분이었는데, 그가 월 땅에 있는 삼강이란 곳을 지킬 때의 일이다. 어떤 죽은 군사가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저의 아내를 그대에게 보낼 테니, 바라건대 저를 위하여 경전 한 권을 독송하여 저의 저승길을 도와 주소서"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한 부인네가 슬피 울며 그를 뵙고자 한다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과연 꿈에서 들은 말과 같았다.
그가 그 부탁을 허락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끊이지 않고 경을 독송했으나, 꿈에 그 군사가 나타나 하는 말이 "그대의 큰 은혜를 입었나이다. 그러나 그대는 겨우 반 권만을 끊이지 않고 독송했을 뿐입니다. 그 가운데 경전에 없는 불용(不用)이라는 두 글자가 섞여 있었나이다" 하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이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경을 지송하는 도중에 부하가 아랫사람을 시켜 찻병을 들여올 때, 그가 멀리서 보고 손을 들어 물리친 적이 있었다. 즉 입으로는 비록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 속으로'불용(필요없다)'이라는 두 글자를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 날은 일찍부터 아예 문을 닫아 걸고 앉아 경을 지송했더니, 이날 밤 꿈에 그 죽은 군사가 사례하며, "이미 저승을 벗어나 저의 갈 길을 가나이다" 하였다. ({죽창수필}).

②경전은 곧 부처님
경전은 부처님의 또다른 현신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익히는 이의 마음가짐도 응당 살아계신 부처님을 뵙는 것과 같아야 한다. 간경수행을 할 때 경전을 펼치면서 독송하는 '개경게'(開經揭)에서도 그런 마음가짐을 확인할 수 있다.

더없이 깊고 높아라 헤아릴 수 없는 진리여
백겁 천겁 만겁을 다시 나더라도 만나기 어렵건만
나 이제 듣고 보아 간직하게 되었으니
원컨대 여래의 참된 뜻을 알게 하소서.

그렇다. 백천만 겁을 다시 나더라도 만나뵙기 어려운 것이 불법이니, 그 만남을 어찌 다른 귀중한 것들과 견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경전이 곧 부처님인 줄 모른다면, 다만 이치를 밝힌 글인 줄만 알면서 다른 책을 읽듯이 경전을 읽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간경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수행법으로써의 본래의 의미를 잃고 마는 것이다.
부처님을 만난다면 어찌하겠는가? 당연히 그분께 기대고 매달려 나의 고통을 모두 소멸하고 해탈의 기쁨을 맛보려 하지 않겠는가? 경전을 익히는 마음가짐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그밖에 어떤 것들도 이 보다 중요하지 않다. 간경행자는 늘 경전이 부처님의 현신이라 여기고 믿어 그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려 들어야 한다.

③지식으로 견주지 말고
타고난 성품을 향해 깊이 들어가는 가운데서 넓은 지혜를 얻지 않고 바깥의 지식을 가지고 경전의 내용을 판단불별하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넓은 지혜를 가지면 나와 남이 따로 없어 다툴 일이 없지만, 좁은 지식을 가지고 아는 척하는 사람은 시비를 다투는 일만 잦아진다.
경전을 공부하면서도 마음이 시비분별하는 곳에 머문다면 그 경전은 이미 '마전'(魔典)이 되어버린 것이며, 경전이 아닌 것을 공부하면서도 마음을 다스려 성품을 밝혀낸다면 그것은 이미 달을 가리키는 여래의 가장 진실한 손가락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대하던 먼저 좋다, 나쁘다. 그저그렇다 하고 분별하고 여기에 따라 끊임없이 추측.판단한다. 이런 습관에 익숙해진 나머지 경전을 볼 때 조차도 판단분별을 쉬지 않는다. 천지 세상의 밝은 광명이 경전에 있건만 자신의 좁은 데롱을 통해서만 보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여래의 지혜를 자신의 좁은 소견으로 분별하고 있으니 개미가 인간의 세계를 헤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디 경전을 볼 때는 짧은 식견을으로 견주지 말고 세속적 가치로 분별하지 말며, 알음알이로 헤아리지 말고, 오직 부처님의 진의를 파악하는데만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다.

④널리 읽어라
간경은 반드시 폭이 넓어야만 비로소 융관하여 偏執에 빠지지 않게 된다.
대개 경은 이 곳에서 건립하면 저 곳에서는 소탕하고, 이 곳에서 소탕하면 저 곳에서는 건립하여 어떤 상황과 수준을 따랐을 뿐, 일정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능엄경>에서 대세지보살이 圓通에 들지 못한 것을 보인 것만을 읽고, 널리 정토를 찬탄한 다른 경전을 읽지 못했으면, 염불법문은 숭상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할 것이요, 달마가 양무제의 물음에 대하여, 공덕은 복을 짓는 것에 있지 않다고 말한 것만을 보고, 널리 육도만행을 가르친 경전을 읽지 않았으면, 유위복덕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정토만을 고집하고 선종을 비방하거나, 유위만을 고집하고 무위를 비방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경의 한 뜻에만 집착하는 자는 혜명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육조단경>은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읽게 해서는 안된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이것만을 고집하여 다른 것은 버릴까 염려해서였다.<죽창수필 1집>

⑤깊이 읽어라
또한 널리 읽는 것만 중시하여 주마간산 격으로 경전을 읽지 않아야 한다. 경전은 지식 쌓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간경수행은 널리 읽는 일과 깊이 읽는 일을 잘 아울러서 공부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경전을 읽을 때는 논리를 넘어 마음으로 읽으면 거기에 담긴 진리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마음을 비추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경전은 살아있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나 경전을 수천번 읽더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깊이 읽고 듣지 않는다면 경전의 참뜻이 풀리지 않을 것인 바, 간경수행자는 모름지기 부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마음으로 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간경수행자는 생각으로 짓는 알음알이가 아닌, 사유를 넘는 사유로 읽어야 한다.

⑥실천하라
경전을 보는 것은 불법수행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계속 강조했듯이 실천이 중요하다. 실천하지 않고 경만 보는 자는 이미 간경수행자가 아니다. 간경수행자가 지켜야할 여러 가지 사항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 이것은 아무리 강조에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理).사(事)를 아울러 중히 여기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차라리 사(事)를 중히 하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理)와 사(事)는 서로 표리의 관계요, 서로 배합하는 관계요, 서로 돕고 서로 이루어 주는 관계에 놓여 있다. 이가 있으므로 해서 사를 짓는 것이 비로소 근거가 있게 되고, 강령이 있고 목표가 있고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요, 사가 있으므로 해서 비로소 이론을 실현할 수 있고 사실을 증거하고 이해하는 정확성을 알 수 있고 그 효과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가 있고 사가 있는 것은 마치 이미 노정(路程)을 알고서 여행하는 것과 같을 것이요, 이만 있고 사가 없으면 이미 노정은 알았으면서 기꺼이 길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며, 사가 있고 이가 없는 것은 길을 갈 줄은 알면서 노정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이를 미루어 이미 노정을 알고서 여행을 떠나는 이와 사를 갖춘 자만이 비로소 성공할 수 있고, 그 밖의 두 가지는 모두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길을 떠나려는 사람이 비록 자신의 지혜가 천박하여 노정을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만약 前賢들이 이미 찾아내어 후인들에게 보여주신 이정표를 참고하여 길을 간다면, 역시 능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경론이나 고덕의 저술이나 그 외 事跡이 바로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후인들이 이를 참조하여 실행하기만 하면 저절로 공을 이루어 고인과 전혀 차이가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만 있고 이가 없는 것은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고, 진정 걱정해야 할 일이라면, 바로 제자리에 앉은 채 입으로만 지꺼리면서 한 걸음도 내디디지 않는 이만 있고 사가 없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사가 없는 자는 또한 이도 없는 자라고 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미 담장이 무너질 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도망하여 피할 줄도 알게 마련이다. 그대로 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는 안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은 일자무식의 우부우부(愚夫愚婦)는 제도할 수 있으나, 세지총변(世智聰辯)한 자나 수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제도할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예전의 주리반타가는 매우 암둔하였으나 마침내 정혹(情惑)이 다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했으며, 제바달다는 총혜명민(聰慧明敏)했으나 끝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비록 뱃속 가득 이해를 채워 두었으나 만약 실제의 수행이 없다면 무시혹업(無始惑業)이 꽁꽁 그대로 봉합되어 털 끝 만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런 것이 사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차라리 부뚜막 앞의 늙은 할미가 온 얼굴에 숫검정을 묻히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 채 때때로 부처님을 상념(想念)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수행인이 만약 종신토록 그저 명상리론(名相理論)의 흙무더기 속에서 지해(知解)만을 구하여, 설사 불학박사(佛學博士)가 된다 하더라도 진실한 수행에 힘쓰지 않는다면, 이런 자를 꾸짖어 '밥을 말로만 해서는 배가 부르지 않고, 남의 보배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는 마침내 가난을 면치 못한다'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구든 이미 이론에 밝고서 다시 능히 불사를 실행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은 복과 지혜가 구족하고 이론과 실행이 상응하여 인과 가 원숙하여 반드시 머지 않아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차라리 사가 있고 이가 없을 지언정 이만 있고 사는 없는 것은 옳지 않다. 불법을 배우는 자는 특히 이 점에 유의해 주기 바란다.<{정법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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