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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한담

    나도 모르는 무주상(無住相)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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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대승불전에서는 보살의 실천덕목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든다. “부처님의 전생인 보살과 같이 살아가겠다”고 서원을 한 후 3아승기 100겁이라는 무한한 세월을 윤회하면서 성불의 그날까지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그리고 반야바라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도움을 받는 남’과 ‘도움을 주는 내’가 한 몸
    바라밀이란 산스끄리뜨어 ‘빠라미따(pa-ram1-ta-)’의 음사어로 직역하면 ‘저 멀리 건너감’을 의미한다. ‘도(度)’ 또는 ‘도피안(度彼岸)’이라고 한역하기도 한다. ‘저 멀리’에 부처의 경지가 있다. 보살은 언제나 깨달음을 추구하고 항상 남을 돕고 살지만 성불이라는 목표에 조급해하지 않는다. 보살도는 ‘무한한 과정적 수행’이다. 보살도의 기간이 3아승기 100겁이라는 상상을 초월한 기간으로 설정된 이유가 이에 있다.
    육바라밀에서 말하는 여섯 가지 덕목 가운데 보시는 재물이나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고 지계는 윤리적, 도덕적 지침을 준수하는 것이며, 인욕은 남의 비방도 참을 뿐만 아니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정진은 마치 영웅과 같이 적극적으로 부지런하게 수행하는 것이며, 선정은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가라앉히는 삼매를 의미하고, 반야는 모든 것이 무상하기에 영원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적(知的)인 통찰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섯 가지 덕목과 육바라밀은 다르다. 예를 들어 ‘단순한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다르다. 단순한 보시만으로는 내생에 기껏해야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을 뿐 해탈하지 못한다. 단순한 보시는 우리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남에 대한 베풂과 봉사와 도움’ 등이다.
    대승불교에서 가르치는 베풂, 즉 보시바라밀은 단순한 보시가 아니다. 보시바라밀은 무주상(無住相)의 통찰과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감성이 함께 하는 베풂이다. 무주상의 통찰이란 “보시라는 행위에 실체가 없다”는 공성(空性)의 조망이다.
    보시가 성립하려면 ‘베푸는 자’와 ‘받는 자’와 ‘베푸는 물건’의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하며 이를 삼륜(三輪)이라고 하는데 보시바라밀에는 이것이 모두 공하다는 자각이 함께 한다. 공성의 통찰과 함께 하는 이러한 보시를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보시’라고 부른다.
    또 보시에 대한 이런 지적인 통찰이 철저해질 때 동체대비의 감성이 솟는다. ‘도움을 받는 남’과 ‘도움을 주는 내’가 한 몸이기에 남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느껴지는 큰 슬픔이다.
    <금강경>에서는 보시바라밀을 ‘무주상(無住相)의 보시’라고 부른다. ‘모습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로 티 나지 않는 베풂이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기독교 가르침에서도 이러한 ‘무주상 보시’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베풂이라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도 몰라야 한다. 누군가에게 내가 무엇을 베풀었을 때 나 스스로에게도 베풀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야 그것이 진정한 베풂이란 말이다.
    <대반열반경>에서는 이런 베풂을 ‘다치거나 병든 외아들을 보살피는 어머니’의 베풂에 비유한다. 극진히 사랑하는 외아들이 다치거나 병들었을 때 어머니는 온 정성을 다하여 보살핀다. 어머니의 간호로 얼마 후 자식이 회복되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풀었다”는 생각을 할 리가 없다. 베풀었다는 생각에 ‘흐뭇한 마음’이 들 리도 없다. 항상 자식이 안쓰럽고 걱정이 될 뿐이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보시로 ‘무주상의 보시’이고 보시바라밀이다.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후 흐뭇한 마음이 든다면 이는 상거래와 같은 보시로 단순한 ‘보시’일 뿐 ‘보시바라밀’은 아니다. 이런 사람은 공성의 통찰을 더 강화시켜야 한다.

    김성철 교수 /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