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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일기

    참회 (재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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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회
     
    제우/사집과 
     
    안녕하십니까?
    사집반 제우입니다.
    11월입니다. 산중의 잎이 다 지고 여름동안 가려져 있던 산과 계곡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계절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11월을 가리켜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이라고 했습니다.
    법정스님께서는 이것에 대해 다 사라진 듯 하지만 또 다시 소생할 여력이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대중스님들 앞에서 저도 11월의 산과 계곡처럼 온전히 저를 드러내어 지나간 삶을 참회하고 따스한 봄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저는 남을 위한 삶을 한번 살아보고자 처음 집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저는 이 말에 매료되어 한 수행공동체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각본대로 라면 삶이 성숙되어 가고 행복해져야 하는데 해가 거듭 될 수 록 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렇게 살면 뭔가 복이 된다는 바라는 마음으로 일을 했고 또 저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길을 선택했다는 잘못된 희생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는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힘들어 하던 그때 여행길에서 만나 알게 된 지금의 저희 은사스님께서 석남사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때마침 친구도 그곳으로 출가했기에 친구도 만날 겸 몇 년 만에 휴가를 내어 석남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것이 인연이 되어 노스님의 출가하라는 말씀에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이끌리듯 그 다음날 머리 깍고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석남사에서의 출가생활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연대를 측정할 수 없는 기이한 세상이였습니다.
    사용하는 단어들도 많이 달랐습니다.
    웃겨서 웃으면 긴장하지 않는다고 걱정듣고, 없는 것 없다고 하면 말이 많다고 걱정 듣고, 주어, 목적어도 말해주지 않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에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하면 말귀를 못 알아 듣는다고 걱정들었습니다.
    습의와 경책 속에서 나타나는 수직적 인간관계는 저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제 자신이였습니다.

    어느 날 아래반 스님들을 습의시키면서 걱정자리를 하다가 저는 그만 화를 못 참고 고양이 쥐 몰듯 하며 소리까지 지르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래반을 습의시키고 걱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그들을 대하는 내 마음속에 분노, 미움, 교만 그리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겼던 한 심리학자의 실험이 생각났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교수 필립 짐바르도는 2차세계대전 종결 당시 유태인 포로수용소의 관리장교를 심문했던 내용을 가지고 ‘교도소 실험’을 했습니다.
    아무리 악하고 잘못된 만행을 저지르더라도 특정제도가 또는 다른 사람이 대신 책임을 져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면 망설임 없이 그 일을 진행하는 심리를 검증하기 위한
    그 실험에서 죄수와 교도관들은 실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실험은 도중에 중단되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난 안 그럴꺼야’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나와 히틀러가 그리고 유태인수용소의 관리장교들이 둘이 아니었습니다.
    유태인의 비극이 내 마음 밖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에 대한 절망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난 초파일 방학 때 선방 스님 한분이 갑자기 쓰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응급차를 불렀는데 강원대장스님이 저보고 같이 타고 가라고 했습니다.
    한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던 저는 싫은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
    왜 하필 나야! 나도 죽을 지경인데!‘ 대답도 제대로 안하고 입이 한 웅큼 튀어나와 응급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때 의식도 분명하지 않은 그 스님이 제 손을 더듬어 찾았습니다.
    손을 꼭 잡은 스님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제 자신이 산 처럼 무너지는 순간이였습니다.
    ‘ 이게 도대체 뭐지? 남은 이렇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곤하다는 핑계로 나만 생각하는 이 눈 먼 마음은 뭐지?
    난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 제 자신에 대한 해체감이 밀려왔습니다.
    세상에 믿고 의지할 곳이 없는 듯한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그냥 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 뿐이였습니다.

    초기경전 ‘여시어경’에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 가사자락을 붙들고 내 발자취를 따른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을 품고 조그마한 일에 화를 내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 있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는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을 보지 못하는 자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람이 저를 말하는 듯하였습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냉정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했습니다.
    며칠 저를 지켜보고 계시던 은사스님께서 조심스레 물어보셨습니다.
    “제우야, 혹시 강원에서 너를 집중적으로 못살게 구는 사람 있냐?” “아뇨” 사실 은사스님께는 깊은 속내를 말씀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치문 첫 철에 강원에 대한 불평, 불만을 말씀드렸다가
     “그래? 지금 당장 짐 싸가지고 나와라. 내가 지금 차가지고 그곳으로 가마.” 라는 은사스님의 말씀에 그 후로 첫 철 동안 전화 한통 못 드렸고
    또 강원에 계속 다니기 위해서는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시커먼 얼굴과 주변을 오염시키는 저의 우울함을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신 은사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우야, 진정한 수행은 지금 너의 그 가난한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란다.”

    어쩌면 저의 출가후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남을 돕겠다고 집을 나선 저는 결국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절망하는 그 순간순간의 틈으로 꽃향기처럼 스며 나오는 알 수 없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모든 순간들이 제 자신을 일깨우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였습니다.

    저는 아직 하루 중 더 많은 순간을 화를 내고, 제 편견을 고집하고, 제 자신의 허물보다 남을 허물을 탓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항상 마음에 담고 하루 중 더 많은 순간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법정스님의 글귀가 있습니다.
    그 글귀를 소개하면서 저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 조금만 더 친절해 질 일이다. 조금만 더 따뜻해 질 일이다.’
    감사합니다.
     
    *** 현재 운문승가대학 사집과에 재학중인 재우스님의 차례법문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