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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일기

    노스님의 커피 - 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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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커피 하면 생각나는 아주 소중한 분이 계신다.
    우리 모두는 그 분을 도감스님이라 부른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커피를 너무 좋아하시고, 커피 맛을 젊은 우리들보다 더 잘 알고 즐기실 줄 아신다.
    그리고 당신 방에 선방 수좌스님들과 학인들이 커피 마시러 오는 것을 매우 좋아 하신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커피만큼은 떨어 뜨리신 적이 없으시다.
    젊은 시절엔 밭고랑을 빗자루로 쓸어 버릴 정도로 깔끔함의 대명사로 불리셨던 성격이시기에
    노스님께 붙잡히면 그날은 모두에게 공포의 날이다.
    도량에 노스님의 모습이 보이기만 하면 모두들 도망 다닐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노스님의 손길이 닿는 곳이면 몇 년이나 묵은 창고도,
    아무리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물것들도 아주 반듯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다.
    노스님은 남들이 귀찮아하고, 하기 싫어하는 일
    도량 곳곳 손길 닿지 않는 곳까지 당신 몫이라 생각하시며 일을 하신다.
    커피를 좋아하시는 노스님은 일을 시키시기 전에
    "얘들아 뭐 좀 먹고 하렴" 하시면서 커피를 타 주신다.
    "수현이는 덜 달게, 아무개는 커피에 설탕 한 스푼만 넣지?"
    노스님은 우리들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다가 다정히 불러 주시고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신다.
    그리고는 반드시 물어 보신다.
    "어떠냐?" 이 때가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면 다시는 커피를 권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참 맛있어요! 노스님은 언제나 맛있게 타 주세요."
    그러면 노스님은 아이처럼 너무 행복해 하신다.
    "커피는 한 방향으로 저어야지 맛있는 거야!"
    노스님은 시자들 공부할 시간 없다고 시자를 두지 않으시고, 몸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며
    빨래는 물론 방청소까지 직접 하신다.
    나는 많으신 연세에도 늘 한결같으심에 어느 날부터 노스님 방청소를 해 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청소를 하고 나면 노스님은 맛있는 커피 한 잔과 함께 많은 얘기를 해 주셨다.
    스님께서 젊은 시절 속눈썹을 잘라가며 공부하시던 얘기들을 듣고 있자면
    그 동안 나태했던 내 모습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지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된다. 
    나에게 선지식은 바로 그 분이셨다.
    내가 노스님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깐깐하고 무서운 모습 속에 감추고 계신 욕심없는 마음, 검박하게 사시는 당신의 삶이다.
    중은 적게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무리 비싸고 좋은 공양물이 들어와도
    당신이 쓰시는 경우는 거의 없으시고 권속 없는 학인들을 챙겨 주신다.
    하루는 노스님과 함께 오래된 낡은 금전출납부를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 속엔 차비며 약값 등 온갖 상세한 내용이 다 적혀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쓴 흔적이 없었다.
    이렇게 검소함을 몸소 보여주시는 모습에
    '수행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니구나'하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노스님은 평소에는 할머니처럼 포근하다가도 그릇된 행동을 할 때면
    눈물이 쏘옥 빠질 만큼 호된 질책을 하신다.
    그러시고는 "내가 너 잘 배우라고 그러는 거다." 하시며 따끈한 커피를 맛있게 타 주신다.
    사랑이라는 소스를 듬뿍 넣어서.
    그러면 서운했던 마음도 잠시, 나는 노스님의 마술 같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환하게 웃으며 행복해 한다.
    지금도 가끔 힘들 때면 평생을 한결같이 검소함과 승다움으로 살아오신 노스님을 생각한다.
    그리고 떨어지려는 내 자신을 추스린다.
    노스님!!
    저는 당신을 언제까지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청암지(49호 2006년 봄호)에 실은 글 - 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