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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일기

    백흥암 영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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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계삼소 - 김영옥    해인지 1998.11(201호) 
       
    올벼는 베어지고 남아 있는 늦벼가 비어 가는 들 지킬 때, 산등성이 억새풀은 머리를 풀기 시작했다.
    황금 일색 다랑논 이고 있는 석축에 그늘과 습기가 한결 짙어질 무렵, 푸른 가지꽃 독하게 피고, 빛 바랜 끝물 봉숭아는 더 퉁기어 낼 씨앗이 없다.
    검은 씨 톡톡하게 알 배고, 잎사귀는 뻑세어져 된장국에 다져 넣기도 틀린 방아풀이 마지막 햇볕 아래 딴에는 맹렬하다.
    산과 들에 뿌리를 박은 초목은 저마다 결실을 향해 치달리니, 철 중에 가장 충일하여 딴 맘 품을 틈이 없는데, 두 발로 걸림없이 나다니는 사람만 철없이 계절을 탄다.
    어쩌자고 풍상에 백비가 다 되어 버린 빗돌 옆에 산국은 저리도 흐드러지게 피었는고.
    별난 기별 있을 리는 천만 없건만 왼종일 집 앞 숲속으로 감춰진 길 꼬리로 눈길 가는 때, 가을이다.
    은해사 백흥암 보화루 큰대문은 오늘도 어김없이 굳게 잠겨 있다. 그러나 오가는 금풍까지 그리 대접할 수는 없었던지,
    누각 위 밀창은 활짝 열려 바람이 자유롭다.
    “가을꽃은 뜻이 있어 강을 향해 열렸”(백곡스님)거니와, 오늘 저 창문 열어 반이나마 제 속 드러내 보이는 것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백흥란야의 당우는 세월의 순리를 그대로 쫒는백골이니 덧칠하여 자신을 꾸밀 생각이 없다.
    이룬 바 없다 하나 구태여 감출 바도 없기 때문인가.
    출가 본사인 석남사의 주지 발령장을 받아 놓은 터이니 열린 창문으로 반쯤은 외기 쐬고 있는 몸이련만, 이 가을에 영운스님, 그저 담담하다.
    "시월 초하루는 여기서 나고 떠날라 해요"
    산중의 밤은 일러서, 늦가을 산등성이로 떨어지는 해보다 먼저 어두워지는 대청마루의 스산한 어둠이 그리도 싫더니, 요즘은 그 증이 더 심해졌다.
    봄에 맑게 피어나는 초록 새순이 꽃보다 더 고와 보이기 시작한 것이 몇 해째 된다.
    소나무 그늘 아래 핀 진달래가 그리도 황홀한 것인 줄 미처 몰랐다.
    사륙년 병술생이니 그의 나이 올해 쉰셋, 한생을 사계로 치자면 여름이랄 수는 없을 때이다.
    그맘때면 볕이 더 좋아지는 것이 몸의 이치라 한다.
    “주인도 객도 없는” 회상 하나 꾸미려고 선방 도반이던 육문 도감 스님과 함께 이 산중을 찾아든 지도 스무 해 가까이 된다.
    석남사에서 돌림으로 맡아야 했던 짧은 소임 기간 말고는 바깥 출입 거의 해 본 바 없이 좌복 위에서만 그 여름 한 철 다 보냈다.
     
    팔공산 동쪽 자락, 본사인 은해사에서도 오 리 숲길 안쪽에 자리한 백흥암은 나대 창건의 오랜 역사와, 도량이 품고 있는 수다한 보물로도 그러하지만,
    초파일 말고는 일 년 내내 속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청정 수행 도량으로서 오늘에까지 귀한 곳이다.
    거름을 주고 가꾸는 것이니 푸른 빛을 떨구는 바 없는 대숲을 병풍 삼아 뒤두른 곳, 멀지도 가깝지도 높지도 낮지도 않게 앞산이 건너다보이는 백흥암은 오늘 맑고 고즈넉하다.
    열댓 대중이 한꺼번에 들어와, 첫 다짐대로, 소임은 나눠 맡아 빗물 새는 심검당에서 칼을 벼리는 한편으로, 조도 중 으뜸인 울력에도 몸을 아끼지 않으니, 정진의 바탕은 튼실하다
    이를 만한 것이었다.
    죽비를 잡는 일, 어른 오시면 모셔 앉히곤 했던 입승의 소임을 그가 맡은 지는 십 년쯤 된다.
    입승의 뜻은 무엇인가.
    목수가 먹을 먹인 노끈으로 나무 위에 먹줄 튕겨 넣듯이 선방의 법도를 새우는 자이다.
    선방의 공부는 죽비를 잡는 입승에 따라 요연히 진행된다.
       
    요즘의 법규를 따라 행자 기간은 여섯 달로 잡아 수계를 하게 하되, 강원행은 삼 년을 채운 뒤에라야 허락되는 곳이다.
    내규를 그렇게 세워 두고 있는 곳인만큼, 선방행을 작정하고 이 곳에서 첫 철을 나려는 사람의 방부는 거절된다.
    그리고 대중이 많이 운집되어 있는 해인사, 석남사, 내원사 등으로 발길을 돌리게 한다.
    큰스님의 법문을 듣거나, 법문이 아니더라도 그 곳에 계신 어른 스님들에게서 무언으로 일러받을 바 있고, 많은 대중 속에서 스스로 깨우칠 바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거치고 이 곳에 방부를 들이는 자라면, 규범이 있으되 저를 묶는 속박이 되지 않고, 오로지 공부하려는 한 생각뿐일 터임을 피아간에 믿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가 오래 머물러 규율을 세우는 곳, 입승의 들고 남이 없는 곳이니 수좌들에게는 공부하기에 편한 곳이 된다.
    우리 입승 스님은 죽비 탁 치고는 돌아보지도 않아. 부드러운 편인 그의 후학 제접 방식을 두고 도감 스님으로부터 듣는 말이다.
    그러나 공부란 바깥의 다그침으로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도, 그렇게 될 바도 아니다.
    그저 결제 중에는 묵언 한 가지 엄격히 지키게 하고, 퇴방을 불허하는 정도의 규율만 세워 놓았을 뿐이다.
    이 곳에서는 누워 쉬는 것도 비교적 자유로우니, 쉰다고 공부마저 쉬는 것은 아니라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 곳에 한 철에 방부를 들이는 납자는 스물 남짓, 가운데 중 자 앉히고 돌려 앉으면 최대한으로 앉을 수 있는 인원이다.
    방사의 규모에 비하면 방을 넓게 쓰는 비구 스님들에게는 놀랄 만한 수효가 된다.
    무시로 드나드는 속인의 기척도 없으니 맘 놓고 화두 한 가지만 들면 되는 곳, 그래서 서둘지 않으면 입방이 여의치 않아지는 곳이다.
    그러나 여러 대중이 앉을 만한 넓고 새로운 공간을 마련할 생각은 없다.
    소임 맡기기도 빠듯한 적은 수효의 대중만 받게 되더라도 그 처지를 벗어날 생각이 없는 것은, 옛날 스님들이 써 오던 방의 힘이 어딘가, 그렇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루하여 내칠 만한 생각인가. 아닐 터였다.
    적정히 유지되는 선방의 규모는 짬진 수행의 바탕이 되어 줄 터였다.
    늘리고 새롭게 하기가 능사요 미덕이 되어 버린 이즈음이니 그의 이런 생각은 귀해서 고마운 것이 된다.
    도감 스님을 비롯하여 공부 한 생각만 하도록 그들을 외호하는 대중의 정성은 지극하기로 호가 나 있다.
    심검당에 바투 붙은 후원의 기척도, 그래서 공부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지는 못한다.
    성심으로 뒷바라지하는 양을 곁에서 눈으로 바로 보면서 발심의 계기로 챙겨 나가기 때문이다.
    피차 위하는 마음이 이러하다.
    속진이 단속되는 단정한 도량에서 외호 대중의 지극한 정성을 받으며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는 곳이니 삼합이 구족된 수승한 수행처로서 부러움을 사는 바이나,
    절로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합심하여 애써 가꾼 귀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형편은 영운스님에게 “복” 으로 칠 만한 것이 된다.
    독실한 불도였던 어머니, 동네 사람 모아 놓고 일쑤 팔상록 읽어 주시던 어머니, 세속 일에 뜻이 없어 보이니 언제인가는 산문에 들 터임을 미리 알고 마음을 가누어 오셨던 것일까.
    열아홉 나이로 출가한 따님은 당신에게 속연을 단정히 거두고 당찬 출발을 해 보인 “마음의 영웅" 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암만 “영운” 이라 일러 드려도 늘 “영웅” 이라 말하고 쓰시었다.
    연탄으로 물 들인 승복 지어 보내면서, “존경하는 나의 영웅스님” 으로 시작되는 석 장 편지로 그의 장도를 축하했다.
    한 사람의 출가는 누대에 걸쳐 집안의 복을 짓는 일이 된다 하나, 피붙이들의 한결같은 성원 속에 이루어지는 이런 출발은 드문 것이니 복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묵스님을 은사로 삼고. 성수스님 모시고 수계한 뒤에, 자청하여 삼 년 공양주 소임을 맡아 산 것은 그가 “지은” 복이다.
    복과 혜 중 어느 쪽이 더 지중합니까.
    그에게 법명을 지어 주신 분이자 참선 한 길로 이날껏 살아오게 한 바탕을 마련해 주신 성철스님은 겸해 닦는 쌍수라야 한다고 이르셨었다.
     “별당 노스님” 으로 아직도 건재하신 인홍스님 또한 복을 지어야 좋은 생각을 낸다 하셨다.
     암만 좋은 장판방이라도 그 곳에서 개구리가 살 수 없다 하시었다.
    삼 년 동안 죽이면 죽, 밥이면 밥을 시간 맞춰 법다이 지어냈다.
    죽은 괄한 불에다 쑤되 펄펄 끓어 넘치려면 바가지로 “디루어” 거품을 가라앉힌 다음, 큰방에 내기 직전 수각에 담가 단숨에 한 김을 내어야 쌀알이 오래 퍼지지 않는다.
    해 뜨기 전에 먹는 식은 흰죽의 이로운 점 열가지… 죽에 관한 한 경지에 이른 듯한 그가 오늘 웃으며 들려 주는 말이다.
    분식이 장려되던 시절, 일 주일에 한 번씩 국수를 삶아야 했던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국수를 승소僧笑라 함은 앉아서 받아 먹는 사람에게나 가당한 말이었던 것이다.
    설봉스님의 쌀조리 밑에서 일천오백 대중이 나왓거니와 우리도 불 때고 밥 푸다가 도 한 번 깨쳐 보세.
     
    하심을 위해 그리 한다지만 공부인인 처지로 일만 한다면 마소와 무엇이 다르랴.
    기도는 기도대로, 정진은 정진대로, 하루종일 불 들이어져 따끈따끈한 부뚜막에서 호롱불 켜 놓고 앉아 밤 정진도 힘든 줄 모르겠던 때, 그의 나이 스무살이 갓 넘은 때였다.
    나중에 상좌 두게 되면 요것만 내보여라.
    만 배 절로 회향한 그에게 그 때 주지 소임을 보시던 인흥스님이 파카 만년필과 상장을 내리며 하신 말씀이었다.
    오늘 자신이 한마음으로 이리 편하게 혜를 닦을 수 있음은 그 때 지은 복 때문이라 여긴다.
     
    강에는 달 비치고
    소나무에는 바람 부니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할일 있을건가.
     
    마음자리 밝히어 모든 경계가 사라질 때, 그리하여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되어질 때, 영가스님이 조계산을 내려오면서 부른
    증도가가 온전한 제 것이 될 날을 앙망하며 지내 온 나날, 성철스님에게 육조단경강 외어 바치고 화두 하나 타서 시작한 길이다.
    시삼마,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운문사에 강원이 새로 열리어 도반들은 보따리 싸들고 떠났건만,
    “사람사람마다 나침반이 있어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이 본래 마음에 있다” 하니 그 자리 찾아 제방 선원을 찾아 나섰다.
    출가 본사에서 팔 년을 살고 난 뒤였다.
     
    해인사 보현암과 약수암, 오대산 지장암, 음성 미타사, 진주 대원사, 내원사, 동화사….
     
    간경을 하되 그것은 선도리를 이르는 것이라야 했고, 방의 굽도리가 끝없이 눈 앞에 떠올랐다 가라앉으니 수마를 조복시키려고 넓은 도량으로 옮아 가 행선을 하기도 했다.
    밤이면 들려오는 군화 발소리는 육이오 때 죽은 군인들의 것이라, 도반 하나 더 불러 함께 밤 정진할 때, 내일이 있으니 잠을 안 잘 도리가 없음이 아쉽도록 치열하게 살 때,
    깨칠 마음이 급하여 물 한 방울 넘길 수 없을 때….
     
    뜻을 세우거나 일을 마무리할 때 으레 따라 붙이곤 했던 절. 백팔배, 칠백배, 천배, 삼천배, 만배… 함께 시작한 대중의 절반이 떨어져 나가기 일쑤인 만배 절.
    만배는 저녁 예불 때 시작하여 밤새 오륙천배는 해 놓아야 돌시에 회향이 돼요. 그 밤에 잠은 작파하고 그저 밥 먹고 볼일만 보고 해야 스물네 시간 안에 끝나요.
    법당에서 보광부울, 보명부울 하는 대참회 소리가 들리면 함께 해야지 방에 못 앉아 있던 때, 남 먼저 일어나고 남보다 늦게 일어났어도 낮에 누워 잠 청하는 법 없던 때….
    법랍 삼십이 넘는 오늘에 이르러, 백흥란야의 입승 소임 맡고 있는 자로서 죽비를 잡고 침은, 제가 살아온 나날이 그러했거니와, 횡으로만 쪼개지는 대처럼 법도에 어긋남이 없이
    공부해나갈 것을 이르기 위함이다.
    그 소임은 또한 남에게 보일 자리가 아니라, 저를 위해 제 마음에 짙고 단정한 먹줄 하나 새기게 하는 것이다.
     
    좌복 펴고 앉은 장판 한 장을 제 토굴로 삼아, 해제고 결제고 간에 독살이 한번 해본 적 없이 대중 속에서만 살아왔다.
     
    시삼마 화두 하나 백천간두 진일보로 나아갈 다리로 삼았던 나날,
    그것이 버거울 때, 방앗간 굴뚝으로 퐁퐁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화두가 저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이 공부가 얼마나 수월할 것인고 탄식하던 나날 보내고
    그는 오늘 가을 한중간에 있다.
    힘든 일이니 한 번 부딪쳐 볼 만한 일, 조금만 성취가 있어도 그렇게 기껍던 그 일, 이 철만큼은 웬만큼 이루리라고 결제 때마다 호흡을 고르곤 했었다.
    구십 일에 속고, 구백 일에 속고, 그래 가지고 삼십 년을 속아 왔어요.
    그가 쓰는 말은 지독한 것이나 그 얼굴은 온유하다.
    올에 해체하여 새로 지은 무이당 그의 처소는 밝고 맑은 가을 햇빛만 가득하다.
    창호지에 풀을 칠하고 찻장의 문에 바르는 그의 손길은 익어서 무심하다.
    몸부림만 쳤던 듯한 세월 보내고, 그것보다는 간절한 마음 한 자락이 더 중요함을 깨친 세월 보내고, 이즈막에 그는 실체는 없고 흐름만 있는 물과 같아 보인다.
    잠이 안 오면 내일 자도 되고, 큰방 좌복 위에서 앉아 졸아도 되는 일이었다.
    지난 날에는 어림없던 일이다.
    선지식의 말씀만 아니라, 도반의 법담도, 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중생의 하소연도 법문으로 들을 만해졌다.
    이상도 했다.
    어느 해부터 팔팔한 도량의 기운이 선연히 느껴지면서 제 마음은 그저 편안하여 무심해졌다.
    결제 때나 산철 때나 한결같이 이루어지는 대중의 기도 덕인가 했다.
    스무 해를 뿌리라도 내린 듯 출입 드물게 살아온 나날, 그리고 가꾼 제 마음의 너른 마당으로 본 바일 터였다.
    마사를 때때로 부어 발로 꼭꼭 다지는 마당, 둘러친 것이 대숲이니 낙엽 날려 들어와 도량 어지럽힐 일 없는 마당,
    여름 아침 열시쯤이면 겹채송화 고웁기가 절정에 이르는 마당,
    삭발날이면 앉을깨 놓고 앉아 풀 폭폭 뽑아 내니 잡초가 발 붙일 틈이 없는 제 마음의 마당이다.
     
    기이했다. 그 도량에 서 있는 가죽나무에 연두색 새 싹이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