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석남사
로그인 회원가입
  • 지대방
  • 차한잔의_향기
  • 지대방

    차한잔의_향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불교적 시간의식- 유찬스님

    페이지 정보

    본문

    ★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불교적 시간의식
     
    영화 예술에 공헌한 위대한 감독들은 많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제 겨우 3편의 영화밖에 만들지 않은 30대 감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지난 100여 년 동안 진화되어온 영화예술의 토대를 뒤흔든 무서운 혁명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1990년대 그야말로 혜성같이 나타나서 세계 영화의 기류를 뒤바꿔 놓은 타란티노의 엄청난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왜 젊은 감독들은 타란티노처럼 되고 싶어 하며, 불과 3편의 영화밖에 만들지 않은 타란티노의 작가론, 작품론은 왜 끊임없이 발표되고 있는가?
     
    타란티노의 영화적 사유 핵심은 그 동안 서구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와 그 대안적인 출구로써 불교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타란티노 영화의 가장 기초가 되는 독특한 시간의식은 한계상황에 다다른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면서 발생되며, 그것이 타란티노 영화를 혁명적으로 인식시킨 힘의 원동력이다.

    타란티노 영화미학의 출발점이 된 갱스터 영화 <저수지의 개들>에서부터 우리는 종래의 영화와 다른 타란티노만의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갱스터 장르는 1920,1930년대에 장르로 자리를 잡은 낡은 형식이지만 타란티노는 이것을 놀랠 만한 창조력으로 비틀어 해체함으로써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 문법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저수지의 개들>을 외면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피에 가득 찬 영상과 극단적인 폭력, 갱들의 저질스런 농담과 독설로 가득 찬 다이얼로그 등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기묘한 구조를 띄고 있다. 실패한 갱들의 후일담이라는 소재 자체가 독특한데다가 갱들 각자의 주관적 시점에서 전개되는 내러티브는 관객들을 관음적인 위치에 머물게 하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내러티브 속으로 쉴 새 없이 개입시킨다.
     
    타란티노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가 해체한 내러티브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시간의 해체이다. 수천 년 동안의 서구 문명을 지탱해준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 시간관은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만찬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적으로 진행되는 선적 시간이다. 이야기의 시작이 있고 발단이 있으며 전개가 있고 결말이 있다. 대중화된 소설문학속의 시간구조도 근본적으로 기승전결식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전개방식이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다르다. 그는 지금까지 영화예술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선적 시간관을 벗어나 그것을 해체한다. 커다란 칼을 들고서 이야기의 순서를 뚝뚝 잘라 여기 저기 파편화하여 해체함으로써 관객들은 극도로 이야기 전개의 정보에 목말라 한다.  마치 흩어진 퍼즐을 모아서 하나의 그림을 구성하듯, 관객들은 영화 속의 물리적 시간이 지속될수록 그 뒤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시간의 흔적들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적 시간관인 선형적 질서를 거부하고 비선형적 세계를 창조한 타란티노 영화미학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탈기독교적이다. 그렇다면 타란티노의 비선형적 세계에 특징적으로 나타난 시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원시 불교에서시간은 존재 그 자체이다. 즉 존재를 인식하는 주관의 인식능력 속에 이미 시간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불교사상에서의 시간은 과학적․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심리적 시간은 법의 무상(anitya)에 근거하고 있다. 불교에서의 현재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상태 그것만의 모습이 아니다.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가 통한다.
     
     타란티노 영화의 독특함을 바로 서구 문명을 지탱해온 선적 시간과 그 결과물인 현재의 가시적 모습을 벗어나 현재의 시간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이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다. 하지만 나 또한 강이다. 시간은 나를 잡아먹는 호랑이다. 그러나 내가 그 호랑이다. 시간은 나를 태우는 불이다. 그러나 내가 불이다 라는 작가 보르헤스의 독백은 인간의 본질이 시간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나와 저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한 몸이라는 이 자각은 명백하게도 불교적 영향에 의한 것이다.
     
    불교의 윤회관은 인간의 시간의식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즉 인간의 모든 정신적인 체험은 시간체험으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삶의 진실을 포착하는 영화 역시 시간예술이다. 영화 속의 시간은 대부분 선형적으로 흘러가지만 플래시백이라는 기법에 의해 영화 속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또 교차편집에 의해 동일 시간대에 각각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함께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이러한 영화 속의 기법을 파괴하면서 비선형적 질서를 창조한다.
    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은 이렇게 놀랍도록 영화사상에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간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탈기독교적인 동시에 친불교적이다. 일종의 선적(禪的)체험이라고 한다.

    불교의 참선이란 일상의 시간을 거슬러 생생한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방법이며, 선이란 일종의 시간체험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선이란 곧 스피드인 것이다.라는 말은 타란티노의 영화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불교적 시간은 원형적이라는 점에서, 직선적 구조를 갖는 기독교적 시간과 대비된다.
    그 원형적 구조는 그러나 둥글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삶은 업(業)에 의해서 보이지 않게 연결된다. 타란티노 영화의 비선형적인 세계질서 파편적 시간관은 바로 이것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유한한 시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이 시간 밖에 영원이라는 무한한 시간을 설정했다. 불교의 윤회사상은 원형적이고 순환하는 시간관의 표현이다. 반면에 기독교적 시간은 직선적이고 일회적이며 유한하다.
     
    타란티노의 두 번째 영화이자 그의 천재적 재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든 영화가 <펄프 픽션>이다. <펄프 픽션>에서 타란티노 영화미학은 확연하게 색깔을 드러낸다. 영화에서의 시간적 구조는 교묘하게 비틀어져 있다. 이야기들은 서로 파편화 되었다가 다시 만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시간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일직선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의식이 타란티노 영화미학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윤회를 기초로 하는 불교적 세계관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
     
    물론 타란티노가 불교 정신에 입각해서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고뇌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서구의 형이상학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간의 비틀림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인데, 타란티노의 데뷔작인 <저수지의 개들>에서 보여준 놀랍고 대담한 시간의 해체와 <펄프 픽션>에 나타난 시작과 끝이 모호한 비선형적 세계 질서의 드러냄이 타란티노의 영화가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일탈해 있다는 뚜렷한 증거로 보인다.
     
    존재를 제외하고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불교의 존재론 속에는 움직이는 시간과 움직이지 않는 시간에 대한 폭 넓은 자각이 있다. 생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오욕칠정의 세계 속에서는 오직 움직이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삶의 숙명적 허무와 맞부딪치게 되는 선형적 시간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결국 움직이지 않는 시간, 이미 존재하는 그 자체로 충분한 절대에 대해 자각케 한다.
     
     일상적 시간을 초월하는 세계에 대한 탐구가 아직 타란티노 영화 속에 구체적으로 묘사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제 그 절대적 시간 속으로 막 한 걸음을 떼어놓고 있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바로 그 바탕에 이처럼 시간의 해체를 깔면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재키 브라운>은 동일시간에서 진행된 이야기들을 각각의 등장인물에 따라 세 개의 이야기로 파편화되어 펼쳐진다. 단일한 물리적인 시간 안에서 관객들은 서로 다른 시점의 이야기들을 부분부분 볼 수 있다. <재키 브라운>은 전체적으로는 선형적 시간의 전개를 따르고 있지만, 그러나 영화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세 갈래로 갈라져 전개된다. 여기 비선형적 세계 질서를 따르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선적 시간관은 결국 현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 시간관념으로 가득 찬 현상계에서 벗어나 무명(無明, avidya)의 거대한 무지를 확고하게 인식하게 될 때, 타란티노의 영화는 또 다른 차원으로 비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타란티노는 본능적으로 서구 문명의 근간인 선적 시간을 파괴하며 새로운 세계를 찾기 위한 모색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그가 존재 그 자체가 시간인 불교적 세계 인식에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영화 미학으로 가득 찬 그의 작품과 마주칠 수 있을지 모른다.
     
    짧은 시간에 세계 영화계의 제왕이 되어버린 타란티노. 타란티노의 영화미학이 단순히 형식적 파괴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 그 밑바탕에는 서구 문명을 지탱해 온 기독교적 시간관을 파괴하고 비선형적 질서를 보여주는 불교적 시간관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타란티노 영화는 하나의 상징이다. 서구 문명은 막다른 벽 앞에서 동양 정신, 특히 불교 정신에서 새로운 자양분을 얻고 있는 것이다.